데스크눈

▲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조선왕조 최후의 날 1910년 8월29일.순종 이척(1874~1926)은 내각 서기관장(훈1등) 한창수에게 태극장을 하사했다.또 재무관(훈5등) 조재영을 훈4등에 올려 서훈하고 팔괘장을 줬다.순종은 역적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마지막 공식 일정을 잡았다.일신의 광영은 1910년 8월22일 조선 이완용 내각 총리대신과 일본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통감의 한·일 병합조약으로 끝났다.일주일 뒤 순종은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는 공표와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순종의 유시는 이랬다.“짐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후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대소 신민들은 국세와 시의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이 조치는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들은 짐의 뜻을 능히 헤아리라.”

조선이 망하자 진사 황현(1855~1910)이 약을 먹고 자결했다.장수 사람이고 호는 매천(梅泉)이다.어려서 노사 기정진을 정신적 기둥으로 모셨다.장성한뒤 서울에서 조선후기 대표적인 현실참여 시인이자 문장가인 영재 이건창,창강 김택영과 교류했다.

1888년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담론을 잘했다.하지만 세상에 할만한 일이 없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가 시와 문장에 마음을 붙여 훌륭한 문장을 구사했다.평소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다.1910년 8월 한일 합방령이 반포되자 그날 밤 아편을 먹고 이튿날 운명했다.매천은 절명시 네 수를 남겼다.‘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네/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 보니/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황제 순종의 유시는 깃털처럼 가볍고 진사 황현의 절명시는 천금처럼 무겁다.순종이 뱉어낸 평화와 행복 그리고 민중 구원이라는 말은 헛되고 기만적이며 치욕스럽다.매천이 선비로서 자진의 순간에 남긴 글은 세한의 송백같이 꼿꼿하고 청청하다.황제의 이름은 이미 썩어 없어졌지만 진사의 정신은 불후해 영원히 빛난다.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늦겨울 칼바람을 딛고 봄을 마주한 한 송이 매화가 붉디 붉었다. 남궁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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