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주인공, 항일독립운동 선봉에 섰던 여성들
영화 ‘항거’ 박스오피스 1위 등
여성 독립운동가 재조명 불구
도내 여성 유공자 15명 불과
윤희순 의병장 외 선양사업 없어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특히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가 삼일절인 지난 1일 박스오피스 1위(당시 26만1953명)를 기록하는 등 주목을 받았다.하지만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가 적고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완료되지 않아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역사속으로 잊혀져가고 있다.그 가운데 강원도내 여성독립운동가에 관한 자료 또한 많지 않다.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국가기록원 등에 따르면 강원도내 여성독립운동가 중 등록된 유공자는 15명에 불과하다.

강원지역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은 춘천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의병활동이 눈에 띈다.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한 의병들이 전국 곳곳에서 맹활약을 펼칠때 춘천에서도 첫 여성의병장으로 활동한 윤희순 의사를 중심으로 여성의병이 조직됐다.윤희순 의병장은 ‘안사람의병가’를 지어 춘천 남면 일원 여성들을 규합,을미의병 시기에 선전 활동과 정보 전달,보급품 공급 등에 나섰다.1907년 정미의병 시기에는 의병전쟁 일선에서 군자금 모금과 무기 제조 등 선제적인 역할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현재까지 윤희순 의병장 이외 30여명의 여성의병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업적 등은 찾지 못하고 있다.유연경 윤희순의사기념사업회장은 “여성들로 조직돼 항일운동을 펼쳤다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정부의 정책부재로 지금까지 유공자 발굴과 독립운동 선양사업이 채 발걸음도 떼지 못했다”며 “국가보훈처에서 정책을 세우고 정부와 지자체에서 예산을 마련해 하루빨리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조사하고 기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1907년 당시에는 일제가 식민지 건설을 위한 사업으로 한국 재정을 압박하자 거족적인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됐다.여기에 강원여성들은 1907년 3월부터 1909년 2월까지 양반가,천주교의 여성부터 교사,관기 출신 여성,여비,여아에 이르기까지 현금이나 패물을 국채보상금으로 내놓았다.강릉지역에서는 관기 출신 초옥·경선·신춘·춘앵·금선·월선·금향·옥선 등 8명이 6환50전을 출연(황성신문 1907년 3월27일자)했고 철원에서는 봉명학교를 세운 이범하의 어머니 김조이와 부인 엄씨,이봉하의 어머니 윤조이와 부인 심씨가 10원과 은가락지 2개를 국채보상기성회로 전달(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25일자)한 사실이 기록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철원·양양지역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활발했다.1919년 3월 10~11일 철원읍내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다 일제에 체포된 곽진근(1861~1940) 애국지사는 당시 주민을 이끌고, 친일파의 집에 들어가 매국노 이완용과 그의 부인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혐의(독립신문 1919년 10월 19일자)로 옥고를 치렀다.이외에도 철원 정의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만세운동에 나선 김경순(1900~?)선생 등 철원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주모자 가운데 6명의 여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양양에서는 조화벽(1895~1975)지사가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학 중 권애라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세우고 헌병대 앞에서 시위를 주도한데 이어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선언서를 전했다.졸업 후 충남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유관순의 동생 관복과 관석을 양육하고 오빠 유우석과 결혼해 노동운동,교육운동을 지속했다.또 같은해 4월 강원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수립에도 동참해 민족정신 계승에 일조했다.1919년 10월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위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조직돼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거나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에 매진했다.

당시 부인회 총무를 맡은 이선실 독립운동가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이자 구국모험단 단장인 원주 출신 김성근과 결혼,1925년 귀국해 원주 문막에 자리잡고 감리교회 야학당에서 후손들에게 민족정신을 가르쳤다.또 김화 출신 김도연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맥스웰지부 서기,로스앤젤레스지부 단장,애국단 총단 서기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강원여성들의 독립운동은 학생,직장인 등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갔다.도내 중등여학교는 1934년 첫 개설돼 1920년대 학생운동에 여성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1920년 3월1일 서울의 배재학교,배화여학교 학생이 벌인 기념만세시위에는 김경화·박경자·왕종순·윤경옥·이남규·지은원·한수자 등 7명이 강원도 출신인 것으로 확인됐다.

또 1930년에는 1월 15~16일 서울지역 여고보와 여학교 8개교의 여학생동맹휴교 만세운동이 전개돼 이천 출신 이화고보생 최윤숙·최복순·김현진과 근화여학교 이계원(철원출신)·이영신(정선출신),숙명여고보 조종옥(홍천출신),이화여고보 염우경(김화출신),정신여학교 하운학(원주출신),여자상업고 김선록(강릉출신) 등 도 출신 여학생 활동이 두드러졌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사회를 위해 전개된 형평운동에서는 1934년 강릉제사공장 동양잠업사 여성노동자 30여명이 1일 15시간 근무에 임금은 겨우 10~20전 밖에 되지 않아 임금 인상과 휴게시간을 달라고 투쟁했고 춘천제사공장 여성노동자들은 1930년과 1934년 임금 및 수당을 터무니없이 깎거나 지급을 늦추는 일본인 경영주를 상대로 파업과 태업으로 항의하기도 했다.철원출신 허균(허마리아)은 서울 대륙고무회사 노동자로 일하며 동대문 외곽 여공들과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1934년 말 검거돼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이양숙 강원서부보훈지청 보훈과장은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을 널리 알리는 선양사업을 추진,국가유공자가 존경받는 사회분위기 조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앞으로 자랑스러운 강원도 독립유공자의 공헌과 애국정신을 모든 강원도민들이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김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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