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핵전쟁 막은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
서울시민 80만명 한강 넘어 피란
적군 1월4일 무인지경 수도 점령
확전파 맥아더 원자탄 사용 주장
군사령관 교체 후 휴전로 무게

▲ 유엔군들이 적의 동태를 마을사람들에게 묻고 있다.(1951.3.13.춘천) ⓒ NARA
▲ 유엔군들이 적의 동태를 마을사람들에게 묻고 있다.(1951.3.13.춘천) ⓒ NARA

#피란길에 오른 1·4후퇴

한국전쟁은 1950년 10월 하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개입과 모진 추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951년 1월 1일 중국군 6개 군단은 38도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12월 24일,서울시민들에게 피란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백과 줄이 있는 사람들은 미리 유엔군이 전선에서 밀린다는 정보를 듣고 12월 초순부터 피란길에 나섰다.12월 말에 이르자 80만 명이 넘는 서울시민이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이들은 한강 부교와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서 건넜다.

1951년 1월 3일 대한민국 정부도 다시 부산으로 천도했다.지난여름 서울 잔류로 수복 후 호되게 당한 서울시민들은 너나없이 대부분 피란길에 올랐다.유엔군은 서울을 떠나면서 웬만한 곳은 다 불질러버렸다.1월 4일 공산군이 서울에 입성했다.그래서 ‘1·4 후퇴’란 말이 생겨났다.하지만 서울은 중국군이 입성하기 직전 텅 빈 도시로 거의 무인지경이었다.

▲ 중국 지원군이 횡성전투에서 공격하고 있다.(1951.2.)ⓒ NARA
▲ 중국 지원군이 횡성전투에서 공격하고 있다.(1951.2.)ⓒ NARA

#트루먼의 휴전vs맥아더의 확전

중국군의 춘계공세로 37도선까지 후퇴한 유엔군은 전열을 정비한 뒤 반격작전을 펼쳤다.1951년 2월 원주 옆 지평리전투의 승리로 자신감을 회복한 유엔군들은 원주-횡성,제천-평창 방면으로 치고 올라가 마침내 1951년 3월 15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이후 전선은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일진일퇴,북위 38선을 축으로 시소게임을 하듯이 오르내렸다.그러자 미국 내 여론은 확전보다 전쟁을 제한하는 기류로 흘러갔다.

하지만 맥아더의 의견은 달랐다.그는 그런 기류를 ‘전쟁에서 싸워 이기려는 의지를 상실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국에 대한 강력한 보복조치로 원자탄 사용을 트루먼에게 요구했다.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여론의 반대와 3차 세계대전 발발을 염려한 나머지 맥아더의 요구를 일축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마침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을 전격 해임했다.이는 그 무렵 미국의 확전 반대 분위기를 대변한 조치였다.맥아더 후임에는 미 제8군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가 임명되고 새로운 미 8군사령관에는 밴 플리트 중장이 임명되었다.새로 부임한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의 최대 관심사는 소련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 문제로,그들은 한국전의 확전보다 명예로운 종전,곧 휴전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 두 인민군 전사가 투항하고 있다.(1951.2.24.횡성)ⓒ 중국해방군화보사/눈빛출판사
▲ 두 인민군 전사가 투항하고 있다.(1951.2.24.횡성)ⓒ 중국해방군화보사/눈빛출판사

저자 박도(朴鍍)는 1945년 경북 구미 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30여년간 교단에 섰다.현재 원주 치악산 밑에서 글 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작품집은 장편소설 ‘약속’‘허형식 장군’ ‘용서’등이 있고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항일유적답사기’‘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영웅 안중근’등을 펴냈다.이 밖에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일제강점기’‘미군정 3년사’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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