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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6·25한국전쟁과 근현대사]11. 끝나지 않은 전쟁

우여곡절 끝 휴전…66년간 쉼표로 남은 한반도 평화
정전회담 진전없이 줄다리기 팽팽
국제정세 급변에 빨라진 협상시계
‘반공포로 석방’ 협정 암초로 작용
1953년 7월27일 냉랭한 휴전

데스크 chpark@kado.net 2019년 06월 29일 토요일
▲ 1951.2.20.원주 전방전선에서 맥아더와 리지웨이 장군이 전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1951.2.20.원주 전방전선에서 맥아더와 리지웨이 장군이 전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정전회담 협상과 고지전투

1951년 7월 10일 마침내 정전회담이 시작됐다.하지만 회담장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포로 송환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양측은 서로 상대를 압박하고자 무력 공세도 서슴지 않았다.유엔군은 폭격기로 북한의 수풍,장진댐을 비롯한 수력발전소를 폭격했고 북한 군수공장에도 폭탄을 쏟아 부었다.공산군도 이에 맞서 지상공세를 강화하자,정전회담 기간 중 전선에서는 포로로 잡힌 병사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1951년 8월 공산군 측은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개성 일대에 대한 유엔군의 야간 폭격에 격분하여 정전회담 결렬을 선언했다.그러자 1951년 9월 6일 유엔군측 리지웨이 사령관은 이를 타개하고자 회담장소를 바꾸자고 제의해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겼다.

하지만 양측 대표들은 회담장소가 바뀌어도 여전히 정전회담장에서 지루한 입씨름만 벌였다.양측은 정전회담에서 서로 주도권을 쥐고 정전 후에도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자 치열하고도 잔인한 고지전을 벌였다.도솔산,피의 능선,김일성고지,수도고지,단장의 능선,백마고지,저격병능선 등지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정전협정 체결 직전까지 계속 됐다.그런 가운데 정전회담을 조속히 매듭지어야 하는 사정이 발생했다.

▲ 1951.8.22.홍천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출처 NARA)
▲ 1951.8.22.홍천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출처 NARA)

1952년 말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전에서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출범 직후 한국전쟁을 끝내고자 적극 나섰다.그는 취임 전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전선을 조용히 시찰하기도 했다.그런데다가 소련에서는 1953년 3월에 스탈린 수상이 사망했다.스탈린 사망은 소련의 미국에 대한 냉전 분위기를 완화시켰다.중국 역시 내전을 마친 지 1년 만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라 피폐한 국내 사정으로 마냥 한국전쟁을 오래 끌 수 없었다.

정전협상 타결 직전인 1953년 6월 18일 밤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조치를 내렸다.이 대통령의 명령으로 전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약 2만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포로들은 일시에 석방됐다.이 조치에 전 세계는 경악했다.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8년 재임 중 유일하게 자다가 일어난 사건으로 “미국은 우방을 잃은 대신 적을 하나 더 얻었다”고 개탄했다.

아무튼 이승만 대통령의 이 조치는 막 닻을 내리려던 정전협정회담에 새로운 암초로 떠올랐다.하지만 정전협정회담장에 앉은 쌍방은 이미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이 돌발사태에 유엔군 측은 한국군이 정전협정을 준수하도록 보장하겠다고 확약함으로써 마지막 암초는 곧 제거 됐다.

▲ 1953.7.27.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회담 조인식 장면.왼쪽 책상에서 유엔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오른쪽 책상에서는 북측 남일 장군이 정정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 1953.7.27.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회담 조인식 장면.왼쪽 책상에서 유엔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오른쪽 책상에서는 북측 남일 장군이 정정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휴전협정 조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마침내 동쪽 입구로 유엔군측 수석대표 해리슨 과 실무자가 판문점 정전회담장으로 입장했고 그와 동시에 서쪽 입구에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과 실무자가 들어와 판문점 정전회담장에 착석했다.양측 대표는 서로 목례도,악수도 없었다.정전회담장은 시종 냉랭한 분위기였다.정전회담장에는 북쪽으로 세 개의 탁자가 나란히 배치됐다.세 개의 탁자 중 가운데 탁자를 완충 경계지역으로 양쪽 탁자에 앉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대표들은 곧 무표정한 얼굴로 정본 9통,부본 9통의 정전협정문에 부지런히 서명을 했다.양측 대표가 서명을 마치자 양측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에 건넸다.

이날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은 각자 서른여섯 번씩 서명을 했다.정전협정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유엔군 전폭기가 하늘에서 무력시위라도 하듯,정전회담장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폭탄을 쏟았다.그런 가운데 양측 대표는 10여 분간 서명을 끝냈다.

그런 뒤 그들은 정전협정서를 교환하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회담장을 빠져나갔다.그때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2분이었다.이날 정전협정 조인식은 회담장 분위기조차 글자 그대로 ‘정전’이었지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한국전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잠시 쉬는 정전협정으로 한반도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정쩡한 화약고로 계속 남아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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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도(朴鍍)는 1945년 경북 구미 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30여년간 교단에 섰다.현재 원주 치악산 밑에서 글 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작품집은 장편소설 ‘약속’‘허형식 장군’ ‘용서’등이 있고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항일유적답사기’‘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영웅 안중근’등을 펴냈다.이 밖에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일제강점기’‘미군정 3년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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