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남 베트남 선교사
▲ 이정남 베트남 선교사
박정희 정권시절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날짜가 ‘1964년 9월’이 아닌 ‘1963년 5월’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이 같은 사실은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이정남(72·사진) 베트남 선교사(당시 특공대원)가 최근 펴낸 베트남 전쟁수기 ‘험악한 광야의 길에서’에서 반세기 만에 세상에 드러났다.그는 “당시 투입된 특공대원 113명의 참전사실이 은폐되면서 그 당시 세상을 떠난 전우들에 대한 참전역사 기록도 묻혀있다”며 “그 당시 기록들이 정당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정남 선교사에 따르면 베트남파병 공식 선포일인 1964년 9월보다 이전인 1963년 5월 극비리에 특공대원으로 차출된 113명의 한국해병대원 특공대(대장 허영 중령) 대원들이 베트남 퀴논 땅에 첫 발을 디뎠다.이들은 미 해병대 앵그리코 부대(부대장 하워드 대령)소속으로 미 부대장 지시에 따라 한국부대 임무가 이뤄졌다.한국인 특공대는 미군 대신 적군 깊숙이 침투해 낮에는 지형정찰과 적의 전력 탐색,밤에는 미군 지시에 따라 헬리콥터로 떨어뜨려주는 곳곳에 매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 미 린든 존슨대통령으로부터 국무성 은성 무공훈장을 받는 이정남 당시 특공대원
▲ 미 린든 존슨대통령으로부터 국무성 은성 무공훈장을 받는 이정남 당시 특공대원
이 선교사는 “미군의 입장에선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를 한국군에 맡겼던 것 같다”며 “당시 한국 특공대 임무는 적(베트콩)을 발견하면 죽이는 대신 생포하는 방침을 지시받았다”고 말했다.이어 “차출된 113명 동료들과 서로 사정을 알아보니 전부 부모나 형제,친척들이 없는 사람들로 죽어도 누구하나 국가나 군부대에 항의할 수 없는 사람들만 골라 특공대로 차출한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또 이 선교사는 “살아생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란 희망을 거의 포기한 대원들은 자신들을 미군 대신 총받이 역할로 사지에 몰아넣은 한국 정부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고 말했다.

▲ 이정남 베트남 선교사의 참전유공자증서
▲ 이정남 베트남 선교사의 참전유공자증서
한편 이 선교사는 1963년 초 서울 경기공업고 졸업 1주일 만에 16세 나이로 해병대에 입대했다.그는 113명 특공대원들 중 최연소자인데다 참전에서 생존한 6명(현재 2명 생존) 중 1명이다.당시 미 해병대는 구사일생 생존한 6명 한국 특공대원에게 린든 존슨 대통령이 직접 미국무성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이 선교사는 베트남 전투 당시 끔찍하게 세상을 떠난 전우들과 베트남인들을 위해 남은 인생을 봉사하기로 하고 벌써 10년이 넘게 베트남 오지에서 생명의 샘 우물파기,베트남 신학생 양성,국제 결혼한 베트남 여성 교육,장애자 고아원 지원 등 선교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토론토/송광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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