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변화 따라 사제역할서 심리상담·치료사 변신
무속인 입문 사연 제각각
최근 상담·심리치료 병행
“ 친근하게 다가서는법 배워”
신당서 사주 카페로 탈바꿈
연령과 종교 넘나들며 인기
불확실시대 마지막 휴식처

 

▲ 춘천 봉의산 인근 점집과 철학관들(위쪽 사진들). 춘천 하늘꽃소리당의 제단(왼쪽 아래 사진)과 설아보살이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고 치성을 드리는 모습.
▲ 춘천 봉의산 인근 점집과 철학관들(위쪽 사진들). 춘천 하늘꽃소리당의 제단(왼쪽 아래 사진)과 설아보살이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고 치성을 드리는 모습.

■모이고 흩어지다

춘천 봉의동에 소재한 한 철학관에 아주머니 몇이 모였다.이 집의 주인은 명리학을 오래 공부한데다 인심도 넉넉해 유명해진 곳이다.진지한 상담이 이어졌다.이직과 결혼을 상담하러 온 이들이다.“결정은 천천히 하셔도 되겠어요.2,3년 정도.서두르지 마세요” 30분이 넘게 진행된 상담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 아주머니들은 웃음으로 인사했다.“좋은 결과있으면 찾아뵐께요”

불확실성의 시대,불안한 미래.이들에게 점집은 위안이자 마지막 기대다.봉의산 일대 사찰과 암자,역술인들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서민들일 수 밖에 없다.이들은 봉의산 일대를 돌며 희망을 찾고 화해와 치유의 길을 묻는다.그렇게 보면 이 일대는 위로와 화해의 공간이기도 하다.그렇다면 이들이 봉의산으로 모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70년대까지만 해도 큰 굿판이 곳곳에서 벌어졌다.춘천의 경우 세도가나 재력가들이 심심찮게 자택이나 암자를 빌려 큰 굿판을 열었다.큰 굿판이 열리면 무당들은 어김없이 작두를 타고 그 위에서 떡시루를 입에 물고 뛰기도 했다.몇 시간씩 계속된 굿판은 지금으로 보면 축제이자 구경거리 없던 시골마을의 공연장이기도 했다.70년대 춘천에서 유명했던 공지천의 만신 ‘황무당’은 춘천MBC 오르막길 입구에서 봉의산과 공지천을 내려다보며 작두에 올랐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내 일대로 흘러들어갔고 세인들의 화제에서 사라졌다.작두에 오르던 큰 무당들도 소리소문없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

 

 

▲ 소양로에 밀집돼 있는 철학관과 점집들.
▲ 소양로에 밀집돼 있는 철학관과 점집들.

도내 한 무당은 “박정희 정권 때는 화전민 철거와 함께 산에 있던 무당들이 많이 쫓겨 났다”며 “당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간판과 깃발을 내리고 시내로 숨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가 지나면서 봉의산에는 무당들이 다시 모여들었다.굿판은 줄어드는 반면 점집과 철학관 등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춘천 요선동에서 유명한 맛집을 운영하는 식당집 둘째 아들인 길시찬씨는 10여년 전 식당 바로 옆에 굿당인 천주암을 차렸다.길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신기(神氣)가 있었다.길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귀신을 봤다.집안에 내력이 있으신 분들도 계시고,저는 머리에 혹같은 것과 고름이 많이 나 고생했다.일이란 일이 다 틀어졌다.부사관을 지원했는데 소대장이 와서 3일만에 죽었다.그런데 죽기전에 뭔가가 보였다.어차피 갈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고 했다.결국 암자를 차리고 무당의 길을 걸어야했다.최근 춘천에서 뜨거운 장소로 소문나 있는 하늘꽃소리당 설아보살은 “심리를 배우거나 그런 적은 없다”며 “신병을 앓다 친언니와 두달간 빙의를 앓고 일주일 차이로 둘 다 내림을 받아 이길을 가고 있다”고 했다.모두 신이 내려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택한 셈이다.봉의산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이런 사연을 안고 있다.소천암 박정수 무당도 “원래 춘천이 고향이다.몸이 아파서 신을 늦게 받았다”며 “한 3년 전만 해도 괜찮았는데 요즘에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안좋다.힘들다 한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봉의산의 기에 이끌려 온 이들도 있다.“강원도 춘천이 어떻게 보면 강원도로서 대표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산세가 강하다.봉의산 뿐만 아니라 삼악산,대룡산,금병산 이 산줄기 자체에 강함이 있다.우리는 신적으로 강한 곳에서 살아야 하고,강한 게 좋다.신발이 강한 곳이다 보니 무속인들이 진짜 많이 모인 것이다”(소양로소재 팔문대신당).무당의 최고권위자인 고 서정범 교수는 “내가 만나 본 무녀들에게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산에 가서 절이나 암자를 짓고 신을 섬기며 조용히 사는 것이라고 한다.그래서 그런지 무녀의 집들은 거의 산기슭에 있다”고 했다.

■믿음의 전설, 굿판서 카페로, 사제서 치료사로

과거의 무당은 사제로서의 역할이 컸지만 요즘엔 인생상담이나 심리치료사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주요 고객은 각종 집안 대소사로 상담하는 일반 서민들이 대부분이지만 정치권이나 공직,사업하는 이들도 주요 단골이다.

출마를 고민 중인 한 정치권 인사는 “아무래도 출마를 결심하려니 얘기를 들어보려고 용하다는 점집을 다녀왔다”며 “얘기를 듣고 그 말을 믿자니 고민이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최근 선거에서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지난 지방선거에서 박빙의 선거전이 계속되자 선거 전날 캠프의 한 핵심인사가 암자를 찾았다.이 암자 주지는 “오늘 저녁부터 마지막 기도를 올릴 예정”이라며 “지금은 어렵지만 반드시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결과적으로 당선 됐고 이 암자가 잠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최근 점집을 다녀온 40대의 한 공직인사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용하다는 점집을 서너곳 다녀온다”며 “한 곳보다는 몇 분들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는 편”이라고 했다.천주암 길시찬 씨는 “정신병원에 가면 상담해주는 사람이 있듯 무속인도 상담사”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이 일대 경기는 예전같지는 않다.봉의산 주변 무당들은 무속도 트렌드를 타다보니 경기가 예전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신내림을 받고 기존 방식대로 점을 쳐왔던 무당들은 우후죽순 늘어나는 타로와 사주카페 등 트렌드에 밀려나고 있다.점을 보는 스마트폰 앱도 유행하고 있다.춘천 지하상가만 해도 타로카페들이 옛 점집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이들 중에는 현대의 심리학,사회현상을 배운 사람이 상당히 많다.봉의산 무당들도 이를 인정한다.소천암 박정수 무당은 “나이드신 분들은 칠성 등 무속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얘기하면 알아들으시고 풀어낸다.하지만 시대가 바뀌었고 젊은 30∼40대가 오면 그들에게 맞게끔 얘기해줘야 한다”며 “마음이 아파서 오면 그 사람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앞으로 힘내서 살아가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다”고 최근의 상황을 설명했다.그는 “너도나도 어려워 수입도 그렇게 없다”고 했다.

이렇다 보니 무속인들도 봉의산 신당만 고집할 수 없어졌다.신내림을 받아도 신당이 아니라 사주카페를 운영하며 젊은 층을 끌어들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신점과 타로나 철학의 크로스오버다.하늘꽃소리당 설아보살은 “예전에는 정말 말그대로 하늘에서 점지하는 사람만 무당이 된다고 했다.하지만 신에서 일러주시는 말씀만 전하며 살아오던 무속이 조금씩 변해 지금은 카페형식 등으로 친근하게 다가서고 있다”고 전했다.설아보살은 “편하게 차를 마시며 점사를 볼수있는 카페는 신점을 무서워하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도 부담없이 상담할 수 있어 젊은 층에 더 인기”라며 “신점을 보면서 타로나 철학으로 풀어보기도 한다”고 했다.

#사라진 기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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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암을 운영하는 무당 길시찬씨가 지금은 막혀 있는 봉의산 기도터 앞에서 기도터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근 춘천 무당들의 화두는 봉의산 중심에 있는 기도터다.소양사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이 도당에서의 제사는 환경과 산불위험 문제 등으로 8년여간 막혀있다.마음 놓고 기도하러 갈 곳마저 없어졌다는 것이 무당들의 설명이다.기도터로 가는 등산로는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무속행위를 위한 입산을 금지한다는 경고문과 철조망만 자리해 있다.기도터를 안내한 길시찬 씨는 “다른 지역은 원주 치악산,화천 용화산,강릉 대관령,태백 태백산,홍천 팔봉산 등 중심이 되는 산에 당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내지만 유독 춘천만 없다”며 “늦은 밤 몰래 기도하러 가시는 분도 있어 여러 고민을 해봤지만 해결 방법이 없어 답답하다.입산기간을 정해놓고 화재가 없도록 잘 관리한다면 막을 이유가 없다”고 토로했다.반면 일부 무당들은 “금지 행위는 자제하는 것이 맞다.꼭 해야 한다면 기도 후 뒷정리 등 무당들의 자정노력도 인식개선을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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