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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사라진 마을을 찾아서] 6. 분단과 전쟁으로 얼룩진 철원읍

역사 속 묻힌 통일국가의 꿈, 평화의 박동에 깨어나다
경원선 개통 후 교통·물류 급성장
1930년 원주·강릉보다 인구 많아
광복 후 소련·공산치하에 편입
6·25 전쟁 치열한 격전에 두 동강
홍원리 궁예도성 동서로 갈라져
태봉국 역사유적 학술조사 시급

박창현 chpark@kado.net 2019년 09월 09일 월요일 26 면
▲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궁예도성터 동쪽으로 백마고지와 피의능선이,북쪽으로 고암산이,서쪽으로 낙타고지가 펼쳐져 있다.  박창현
▲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궁예도성터 동쪽으로 백마고지와 피의능선이,북쪽으로 고암산이,서쪽으로 낙타고지가 펼쳐져 있다. 박창현

철원 만큼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곳이 있을까.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형학적 영향으로 한때는 한반도의 통일국가를 꿈꾼 풍운아 궁예의 태봉국 도읍지였고 근현대에는 사람과 물산이 몰린 상업도시이자 일제의 수탈이 가장 극심했던 비운의 역사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철원의 역사는 1945년 8·15광복을 계기로 소련과 공산치하에 편입되면서 굴절됐고 6·25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휴전선의 경계를 두고 남철원과 북철원으로 두동강나면서 비무장지대에 터전을 잃은 왜곡된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DMZ 마을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고 마을의 기록과 흔적 마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이런 철원이 또하나의 DMZ스토리를 준비하고 있다.남북이 대치한 최전방 접경지역에서 세계평화의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심지인 철원의 사라져가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본다.


▲ 1945년 해방 당시 행정구역경계. 자료/철원군지
▲ 1945년 해방 당시 행정구역경계. 자료/철원군지


■ 근현대문화유산의 보고(寶庫),철원읍

철원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원선(서울~원산)이 개통되고 근대적인 수리시설이 갖춰지면서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로 급성장했다.1930년 당시 인구는 8만479명에 달해 춘천(8만3352명),원주(7만2691명),강릉(9만2507명)과 어깨를 나란히 한 강원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당시 철원면(현 철원읍) 인구가 1만5458명이었고 사요리와 외촌리,관전리 일대를 중심으로 교육기관 5개소,금융기관 4개소를 비롯 일반 관광서와 각종 기관들이 모두 34개소에 달할 정도로 경제중심지였다.이곳은 6·25한국전쟁 당시에는 휴전을 앞두고 강원도 최대 곡창지대를 놓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면서 번성했던 도시흔적은 한 순간에 폐허로 변했고 지금까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현재는 영농인에 한해 출입이 허용되는 민통선과 비무장지대로 묶인 최전방지역이지만 그나마 파괴된 건물들의 흔적을 통해 화려했던 철원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본지 취재진이 지난 5일 국도 3호선을 끼고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민통선 내 철원읍 외촌리와 사요리 일대 옛 시가지를 찾았다.군부대 초소를 지나면 곧이어 오른편으로 옛 철원군청사 건물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고 일제강점기 방직공장으로 일제 기업의 수탈현장이었던 종연방적(鍾淵紡績)철원공장 터가 남겨져 있다.이 곳은 인근에 ‘지뢰’의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이 철조망에 매달려 최전방의 삭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이어 철원근대문화유적센터 비석과 옆으로 1936년 당시 철원지방의 농산물 품질을 검사하던 공공기관이었던 2층 규모의 ‘철원 농산물 검사소’가 건물형태를 유지하고 있다.이곳을 얼마 지나지 않아 1930년대 식당을 운영하던 일본인이 콘크리트 건물로 세운 고대의 석빙고와 같은 ‘얼음창고’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벽의 두께가 15㎝에 이르지만 한국전쟁 당시 천장이 내려앉아 벽채만이 총탄의 흔적과 함께 남아있다.또 옛 철원읍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는 제2금융 조합 건물터가 폐허로 변한 채 금고로 추정되는 일부 건물잔해를 보여주고 있다.이어 1906년 개교했지만 현재는 지뢰지대로 변한 옛 철원공립보통학교와 한때 입원환자 6630명,외래환자 연 2만5947명에 달했던 강원도립 철원의원 건물터도 아련하게 남아있다.
▲ 경원선과 금강산선전기철도의 분기점이 되는 철원역 철로.한때 금강산 여행을 떠나는 기차역으로,철원의 중심지였다.  자료/철원역사문화연구소
▲ 경원선과 금강산선전기철도의 분기점이 되는 철원역 철로.한때 금강산 여행을 떠나는 기차역으로,철원의 중심지였다. 자료/철원역사문화연구소


■ 경원선과 금강산전기철도 분기점,철원역

철원읍 옛 시가지를 관통하는 국도 3호선을 타고 멀리 낙타고지를 바라보며 시원하게 곧게 뻗은 도로를 4㎞ 가량 달리면 폐역으로 남겨진 철원역이 나온다.민통선지역인 철원읍 외촌리에 소재한 철원역은 경원선(서울용산~원산)의 중간역이자 금강산전기철도(철원~창도~내금강 장안사)의 시발역이다.일제강점기에는 서기관급 역장 포함 80여명의 직원이 근무했을 정도로 번화했던 철원의 중심지였다.철원역은 1914년 경원선 부설에 이어 1924년 12월 금강산전기철도가 본격 운행되면서 2개 기차노선이 교차한 분기점이 되었다.이 때문에 철원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사업가,통학생 등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된 시가지였다.특히 당시 중·고등학생 시절을 겪은 세대들은 금강선전기철도를 타고 수학여행을 다니던 추억을 빼놓지 않고 회상하고 있다.

하지만 1945년 8월 해방 후 남북이 갈리고 철원이 북한 공산치하에 편입되면서 경원선 운행도 중단돼 철원역의 기능은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고 현재는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채 승강장과 철로 일부만 남아있다.박종민 철원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은 “철원역은 표면적으로 교통,물류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일제가 곡식과 자원을 반출해간 거점지역이었다는 수탈의 역사도 숨겨져 있다”며 “경원선 복원이 남북의 화두로 떠오른 만큼 철원역의 역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옛 철원군청사터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잡초에 가려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 옛 철원군청사터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잡초에 가려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 북위 38도선 궁예도성 품은 홍원리

철원군은 1972년 12월28일 북면 유원리,홍원리를 철원읍으로 신규 편입한다.이들 지역은 현재 남북을 가르고 있는 휴전선의 한복판에 위치한 곳이다.특히 철원읍 홍원리(洪元里)는 ‘철원 속 또하나의 사라진 도시’ 태봉국의 도성터가 남겨진 곳이다.후고구려 시기(905년) 궁예가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지었다 하여 ‘궁예도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해발 220m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야지대인 풍천원(楓川原) 들판에 외성 둘레 12.5㎞,내성 7.7㎞,왕궁성 1.8㎞로 3중성 구조로 축조된 도성이다.도성의 규모는 풍납토성(백제 3.5km) 보다 월등하고 한양도성(조선 18km)과 견줄 수 있는 크기다.도성에서 동쪽으로 화살머리고지,백마고지,피의능선이 펼쳐지고 북쪽으로 김일성 고지(고암산·해발 780m)와 봉래저수지가,서쪽으로 낙타고지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궁예도성의 운명은 918년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긴 궁예가 비참한 최후를 맞으면서 오래가지 못했다.그 시련은 1000년 가량이 지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철원역~월정역~원산역으로 이어지는 경원선 철길노선이 도성의 남북방면으로 지그재그 관통하면서 무참히 훼손됐다.한국전쟁 당시에는 드넓은 평야를 차지하기 위한 국군과 인민군의 전쟁터로 변했고 정전협정 이후에는 남북 군사분계선이 북위 38도선에 놓인 도성의 동서방면으로 그어지면서 또다시 갈기갈기 찢기는 운명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금단의 땅으로 남아있는 궁예도성은 사지(四肢)가 잘린채 성터의 윤곽만을 남기고 파괴됐다.도성 내성에는 궁예만이 사용한 어수정과 석등 등 많은 유적이 있었으나 남북이 대치한 비무장지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관계로 확인이 불가능하다.동아일보 1938년 8월29일자 기사를 보면 ‘당시 보물 18호로 지정된 궁예석등이 농지로 이용되면서 잡곡과 잡초로 우거지고 더러워져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에서 철원군에 통첩하여 석등을 손질하고 벚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고 나온다.그 만큼 일제도 태봉국의 존재와 그 안의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다행히 지난 해 9·19남북군사합의서에 비무장지대 내 유해발굴과 함께 역사유적 공동조사가 포함되면서 궁예도성의 학술조사가 1순위로 거론되고 있다.궁예도성의 남북공동 학술조사가 실현되면 민족정체성을 복원한다는 의미에서도 기대가 커지고 있다.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일제가 우리나라와 철원의 정체성과 정기가 담긴 태봉국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궁예도성의 남북을 가로질러 경원선의 노선을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며 “철원의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자료수집과 학술조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박창현 chpark@kado.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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