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타계한 이승훈 시인
15년 투병기간 일력에 적은 기록
제자 5명 꼬박 1년간 출판작업
출판문화진흥원 우수지원 선정

[강원도민일보 김진형 기자] “그럼 됐다.그럼 됐어.무엇이 더 필요한가.무릎을 펼 수 있는 작은 정자면 된다.나처럼 할 일 없는 노인,그것도 병이 든 노인이 걷다가 잠시 무릎이나 펴고 앉으면 된다.사람은 하나도 없고,빈 정자,그것도 작은 정자다.오늘은 눈이 오려나.하늘을 쳐다본다.그리운 친구도 없고 그리운 산만 있다.시래기 시래기 나는 담장에 걸린 시래기야.(시 ‘무엇이 움직이는가’ 전문)”


“이제 알 것 같아,이젠 알 것 같아”

지난해 1월 타계한 춘천 출신 이강 이승훈 시인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알게된 것은 무엇일까.이승훈 시인의 유고시집 ‘무엇이 움직이는가’는 15년의 긴 투병생활 기간 탁상용 일력의 작은 메모지에 떨리는 손으로 사력을 다해 쓴 깨달음의 기록이다.

유고시집 출간을 위해 송준영 시와세계 주간을 비롯해 박찬일 추계예술대 교수,이수명 시인,김미정 평론가,고영섭 동국대 교수,유성호 한양대 교수 등 이승훈 시인의 내로라 하는 제자 5명이 모였다.삐뚤빼뚤 알아보기 힘든 글씨를 책으로 펴내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4부로 나뉘어진 책은 제목이 있는 시 49편과 2부 첫 줄 제목 시(완결작품으로 판단해 첫 줄을 제목으로 삼은 시) 32편,3부 제목이 없는 시(미완의 작품으로 판단해 제목을 붙이지 못한 시) 41편,4부 작가 생전 시집으로 엮지 못한 문예지 발표 시 14편으로 구성됐다.자필 기록들이 모두 그대로 실려 시인이 눌러쓴 필체의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이기도 한 이번 시집에는 출간을 맡은 제자들의 리뷰 5편과 이승훈 시인이 2011년 ‘유심’에 발표한 비망록 ‘벼랑 끝에서 손을 놓아라’도 들어있다.

서정이나 참여라는 주제의식에서 벗어나 한국 시단에 ‘비대상시’를 관철시킨 이승훈 시인은 이상,김춘수를 잇는 모더니즘 시의 대가로 평가받는다.아방가르드 계열 시들의 쏠림이 두드러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 트렌드를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 무엇이 움직이는가-이승훈 유고시집
▲ 무엇이 움직이는가-이승훈 유고시집

후기 불교 선법의 영향을 받은 그의 유고시집을 보면 오랜 투병에도 불구하고 더욱 생생해진 글을 느낄 수 있다.라캉,데리다 등 서양철학자들에게서 무의식의 세계를 익힌 후 선 사상으로 궤를 이어가며 동서양 사상을 아우른다.특히 ‘흐르는 물도 서 있고,하하 달리는 물도 서 있다’와 같이 잡힐듯 잡히지 않는 순간에 대해 기록한 부분이 인상적이다.그의 시는 과거,현재,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찰나를 살아가며 삶과 죽음에 대해 조금 더 선명하게 이야기 한다.

50여년간 이 시인과 인연을 맺어 온 송준영 시인은 “죽음을 앞둔 시인이 쪼그려 앉아 혼신의 힘을 다해 시를 써온 과정이 애잔하다.136편의 시를 제자들이 묶은 이번 책은 한국 문학사에 남는 국보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고 이승훈 시인은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초·중·고,한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동 대학원에서 석사,연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춘천고 재학시절 은사인 이희철 시인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1962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시집 ‘사물A’,‘당신의 방’,‘이것은 시가 아니다’와 평론집 ‘선과 하이데거’,‘포스트 모더니즘 시론’ 등을 펴냈다.춘천교대 부교수를 거쳐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만해대상,현대문학상,이상시문학상 등을 받았고 2008년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도를 깨친다고 날마다 산길을 가지만 오늘 아침엔 까치 한 마리 풀밭에 앉아 나를 쳐다보네. “어디 가시우?” 까치를 보고 다시 하늘을 본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 도를 깨친다는 이 헛된 망상이 우습다. 어제 저녁엔 동무가 모임 중간에 집까지 바래다 주었지.   두 시간 반 모임에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아픈 몸으로 후배 시인들과 수작하고 웃던 밤도 (위 시인의 메모 속 ‘빨래터’ 전문)”
“도를 깨친다고 날마다 산길을 가지만 오늘 아침엔 까치 한 마리 풀밭에 앉아 나를 쳐다보네. “어디 가시우?” 까치를 보고 다시 하늘을 본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 도를 깨친다는 이 헛된 망상이 우습다. 어제 저녁엔 동무가 모임 중간에 집까지 바래다 주었지.

두 시간 반 모임에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아픈 몸으로 후배 시인들과 수작하고 웃던 밤도 (위 시인의 메모 속 ‘빨래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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