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수 강릉수요포럼 회장

▲ 정인수 강릉수요포럼 회장
▲ 정인수 강릉수요포럼 회장
1991년 30년만에 부활한 풀뿌리 민주주의에 의해 도의회가 개원했다.이듬해 모 지방일간지 사옥 한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기자들이 정론을 외치면서 외로운 농성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필자는 강원도의회 이기순,성희직,정충수 의원 등과 함께 음료수를 사들고 농성현장을 찾아 격려했다.이후 몇 차례 더 방문하면서 그들의 정의로운 행동에 연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강원도민일보(이하 도민일보)는 1992년 11월 26일 도민에게 첫 선을 보였다.도민일보 창간은 그동안 수십년간 특정언론의 독과점 체제가 무너지고 경쟁의 시대가 시작되는 신호탄이 발사되는 순간이었다.신생신문 도민일보의 출발은 유별했다.지방지에서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비교적 젊은 지성인 기자들이 주축을 이뤘고,안형순 사장의 뚝심과 영원한 저널리스트 김중석 당시 정치부장(현 사장)의 혜안과 영민이 더해져 도내 언론의 새 지평을 연 충격이자 대사건이었다.

로컬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일간지 창간은 시대적 요구이기도 했다.도민일보가 창간됐을 때 도의회는 때마침 정기회 중이었다.의회출입 노기혁 기자가 창간호를 들고 와 자랑스럽게 의원들에게 펼쳐 보였을 때 한눈에 봐도 칼라 제호부터 기존 신문과 차별돼 신선함에 감동했다.도민일보의 발굴 기사는 눈여겨 볼만했다.비운의 장준하 선생을 재조명하고 필자가 중국 연변을 드나들며 알게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00년부터 시작한 민족시인 심연수 발굴사업,만해 한용운 사업 등 민족의식과 시대정신에 입각해 시시비비를 분명히 하는 균형있는 보도 패턴은 여느 신문과 비교해도 단연 으뜸이었다.

필자는 도의회 새정치국민회의 원내대표로 있으면서 도의회와 도민일보간 자치봉사대상 제정에 깊숙이 관여했고 김대중정부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단에 도민일보가 포함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도민일보는 필자가 초선의원 당시 의욕적으로 벌인 강원남북교류사업 과정에서 ‘대북교류 서한’이 일파만파 사회적 문제로 비화하자 사실에 근거한 정론을 펼쳐 독자들에게 언론의 사명과 공기(公器)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도민일보 기자들이 창간정신을 잃지 않고 현장중심의 생동감 있는 기사 생산에 항상 열정적이라는 사실은 미래를 더욱 밝게 한다.도민일보는 의미있는 행사를 다채롭게 많이 벌여 지역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자치분권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 기회에 도민에게 간곡히 바란다.도민일보를 무한히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이유는 간단하다.도민일보는 순도 100%,도민의 힘으로 도민에 의해,도민을 위해 창간된 명실상부 도민이 지배주주이기 때문이다.또 도민일보에는 공익성과 공정성을 전제로 한 멸사봉공의 자세로 정론직필에 충실할 것을 당부한다.도민일보와 남다른 인연을 가진 필자는 도민일보 사시(社是)대로 ‘도민을 생각하는 신문,도민이 사랑하는 신문’으로 거듭 일취월장하기를 소망한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