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호 산골짜기 문화예술 꽃 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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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씨가 피땀흘려 일군 소양예술농원에서 열린 문화·예술 워크숍 모습.
 소양호 선착장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수영골, 배를 타고 건너가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별천지가 펼쳐진다. 10만여평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목조건물들, 주연네 모차르트네 바하네 베토벤네 그런 건물들 한 편으로 호수를 내려다보는 야외공연장과 간이 족구장까지 마련된 숲속 동네, 소양예술농원이다.

수몰 고향 지키며 지게로 벽돌 옮겨 조성
개원후 56회 공연 NYT 세계 5대 농원 꼽혀
"공연때마다 빚… 문화 공간 꿈 이뤄 행복"


 이 농원을 일구기 위해 20여년 동안 삽과 괭이로 산비탈을 깎고 지게로 목재를 져 올리며 피땀 흘린 사람 최인규(48)씨는 실향민이다. 소양강댐이 막히고 댐 상류 크고 작은 골짜기와 버덩들이 물에 잠기면서 최인규씨는 고향을 잃었다. 수몰지역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도시로 모두 떠났지만 그는 쪽배를 타고 거대한 소양호 언저리를 맴돌았다. 한마리 물방개처럼. 지금도 어릴적 뛰놀던 물속 동네 고샅이 눈에 선합니다. 북쪽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은 통일을 기다리며 고향을 그리지만 저는 물 속에 잠겨있는 고향 땅을 다시는 밟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가끔 배를 타고 고향 마을 위를 빙빙 돌며 물에 잠긴 세월을 가늠합니다.
 고향 마을을 되찾을 수는 없지만 마을 뒷산 줄기 어느 곳에라도 둥지를 틀어 눌러앉고 싶었습니다. 고향마을 추전리에서 멀지 않은 산막골에 움집을 묻고 삶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했죠. 산비탈 바위틈새에 토종벌통을 놓고 개와 염소를 키웠다. 유일한 교통수단은 쪽배 한 척, 그는 그 작은 배에 쌀 라면 소주 부탄가스 등을 싣고 노를 저어 낚시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다. 새로 생긴 소양호 골짜기마다 낚시꾼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수입이 제법 짭짤했다. 소양호 낚시꾼들에게 젊은 '털보 최씨'는 비상식량 공급책이었고 예기치 않은 악천후엔 재난 구조원이기도 했다.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열심히 노를 젓고 다니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수영골 골짜기 땅을 조금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수영골 골짜기에 문화예술마당을 꾸미는 게 꿈이었습니다. 산과 물 바위와 숲이 어우러진 소양호 깊은 골짜기에서 향기높은 문화예술의 꽃을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서 차츰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엉뚱하고 황당한 꿈같지만 그에게는 그런 꿈을 꿀만한 계기가 있었다. 20대 초반 잠시 서울의 모 문화재단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다양한 장르의 젊은 문화 예술인들을 만났다. 그들이 자신의 끼와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아 늘 갈증을 느낀다는 사실도 알았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양호 깊은 골짜기에 문화 예술 멍석을 펴보자. 청정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문화예술 마당이 내 고향 춘천의 새로운 명소로 뿌리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삽과 괭이를 들었다. 수영골 어귀에 배를 묶어놓고 돌투성이 산비탈을 깎아 길부터 뚫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빽빽한 숲, 계곡물 맑게 흐르는 골짜기를 일궈 움막 한 채를 짓고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터를 닦았다. 장비래야 삽과 괭이 도끼와 낫이 전부였다.
 20여평짜리 집 한 채가 들어설만한 터가 생기자 그는 부지런히 시내를 드나들며 목재와 벽돌을 사들였다. 시내버스 기사의 눈치를 보며 벽돌 10장 20장씩 싣고 소양호에 와서 쪽배에 옮겨 싣고 들어왔습니다. 물가에 벽돌이 제법 쌓이면 지게로 한 짐씩 지고 비탈길을 올라왔습니다. 염소를 내다팔고 꿀을 따서 판돈으로 건축자재를 조금씩 조금씩 사모으면서 수영골 골짜기에 들어설 예술마당의 밑그림을 그렸다. 예술인들과 관중들이 자유롭게 어울려 공연하고 즐길 수 있는 무대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 문화예술인들이 아무 때나 워크숍을 할 수 있는 공간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이 며칠 쯤 묵어갈 수 있는 공간…. 자재가 모이는 대로 공사를 벌였다. 10년이 모자라면 15년, 15년에 안되면 20년, 20년이 지나도 못다 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했습니다.
 지난 98년 마침내 소양예술농원이 문을 열고 김덕수사물놀이를 초청해 기념공연을 했다. 조촐하지만 빛나는 개원기념공원이었다. 괭이와 삽으로 길을 뚫고 지게로 자재를 져 나른지 18년만에 이룩한 예술마당입니다. 육신의 고된 노역보다 몇 배나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사건건 행정의 허가를 받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삽과 괭이로 일을 하면 되어도 장비를 들이대면 불법이고 노 젓는 배는 되지만 동력선은 허가해줄 수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수십 수백차례 행정관청을 드나들며 합법과 불법의 모호한 선을 넘나드는 동안 어느새 악질 민원의 표본으로 취급받기도 했습니다. 무대공연의 조명을 위해 전기는 필수였다. 그 전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는 서울의 산업자원부까지 찾아가 지난 2003년 가을 드디어 전깃불을 켤 수 있었다.
 소양예술농원이 문을 연 후 지금까지 펼친 공연은 모두 56회, 김덕수 사물놀이와 안숙선 판소리 재즈콘서트 연극 무용 등 크고 작은 공연이 이루어질 때마다 최인규씨는 빚을 진다. 관객들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공연이라 공연진들이 출연료를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여기저기 돈 들어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공연을 알리는 현수막도 제작해 곳곳에 걸어야 하고 공연진들이 돌아갈 때는 기름값이라도 보태주어야 한다. 대부분 사양하지만 그는 억지로 봉투를 건넨다. 출연자들과 스태프 관객들을 위한 음식을 장만하는 데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한 번 공연에 들어가는 돈이 줄잡아 500여만원, 그래도 공연 끝나고 관객들이 내놓는 돈은 따로 떼어두었다가 행정기관에 문화예술 기금으로 기부한다.
 미친 놈 소리도 듣고 심지어 사기꾼이라는 말도 듣지만 제 꿈이 이루어진 행복감에 그런 비아냥거림이나 폄하는 귓전으로 흘려버립니다. 내 젊음을 다 바쳐 이룩한 문화예술 공간이 전국 곳곳 문화예술인들에게 사랑받고 이 지역의 명소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저는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소양예술농원을 본격 휴양 숙박시설로 운영한다면 돈버는 재미가 괜찮을 텐데…. 아닙니다. 처음부터 돈 벌자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돈 벌겠다는 욕심도 없습니다. 자연·농업·예술이 한데 어우러진 복합공간 소양예술농원은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세계 5대 예술농원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0년 후 20년 후 찾아와도 변화되지 않은 농원 모습에서 추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지켜가고 싶습니다. 23년 외길로만 치달아온 그의 소망은 뜻밖에 소박했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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