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돈민 강원발전연구원 부원장
‘한국 땅 떠날 수밖에 없던 기업들, 국내 투자 길 열렸다’,‘수도권 규제개혁, 갈등 넘어 상생으로’

지방민의 가슴에 피멍을 남길 10·30 수도권 규제완화 발표 이후 중앙의 주요일간지 기사제목들이다. 어떻게 이런 타이틀을 뽑을 수 있을까? 수도권규제를 풀음으로써 정말로 수도권과 지방이 서로 ‘상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우리는 중앙일간지들을 전국적으로 유통된다고 하여 ‘전국지’라고도 부른다. 지방을 이해하거나 배려할 줄도 모르는 이러한 신문들을 과연 전국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지방지와 수도권지가 있을 뿐이다. 수도권 소재 대학교수들의 기고문도 이번 발표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조용한 지방학계와 대조적이다.

수도권규제완화는 수면 상의 작은 파문으로 발생하여 종국에는 큰 해일이 되어 휩쓸어가는 쓰나미를 닮았다. 일반인들 입장에서 수도권규제완화를 했다고 해서 그 부정적 효과를 당장 감지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를 통하여 수도권 밀집현상이 심화되고 그에 수반된 사회비용 해소를 위하여 정부투자가 확대된다. 수도권의 여건이 좋아지면서 자원의 수도권 집중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반대로 지방은 만성적 자원부족에 따른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고 인구나 기업 등은 더 빠르게 수도권으로 유입될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이번 메가톤급 완화조치로 더 한층 견고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막말로 수도권 정치인들이 주장하듯이 우리 국민 모두가 수도권에 가서 살지 뭐. 이러면 문제가 해결될까? 예를 들어 보자. 사막 한가운데 양을 키울 수 있는 넓은 초지가 있다. 이 초지의 규모는 100마리의 양을 키우면 적정하다고 가정하자. 이 초지가 사유지라면 주인은 양을 100마리 정도로 유지함으로써 양도 잘 키우고 초지도 훼손되지 않게 지킬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초지가 공유지라면 어떻게 될까. 너나없이 남보다 더 많은 양을 키우려고 경쟁하다가 종국에는 풀 한포기 안 남는 불모지로 변하게 된다. 양 주인들이 합리적이라면 서로 타협하여 전체 양의 수를 100마리가 넘지 않도록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좀 더 똑똑하다면 초지를 외곽으로 넓게 확장하여 더 많은 양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의 국토환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수도권이라는 초지 밖으로는 불모지인 지방이 있을 뿐이다.

‘한국 땅 떠날 수밖에 없던 기업들’에게 지방은 한국 땅이 아니다. 기업할 수 없도록 버려진 불모지에 불과하다. 기업들은 또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글로벌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지방에 대한 동정심(?)은 사치일 수 있다. 그렇지만 정부는 그럴 수 없다. 국정은 비즈니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헌법에 균형발전을 국가의 의무로 명기했을까. 어렵지만 꼭 달성되어야 할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가치라는 말 아닌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너도나도 수도권 가겠다할텐데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수도권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시키겠다고 한 조치가 오히려 수도권을 ‘공유물의 비극’상태에 빠뜨려 영원히 선진국 진입이 좌절되는 것은 아닐지.

정부는 광역경제권 구상을 통하여 사막 속의 초지를 넓혀보려고 한다. 지방에 대한 SOC 투자확대는 풀을 자라게 할 물길이나 다름없다. 정부가 방향은 바로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참여정부 시절에 유행하던 말이 있다. ‘지방에 대한 투자는 어음이고 수도권 규제완화는 현찰이다’.

수도권 규제완화로 인한 흡인력은 지방투자를 통해 실현되는 지방의 자생력 성장보다 훨씬 빠르게 나타난다. 지방자치시대라는 것이 더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수도권 자치단체가 막강한 재정력을 바탕으로 수도권 내 산업단지를 조성원가 이하로 싸게 공급한다면 지방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싼 땅값의 경쟁력조차 발휘할 수가 없다. 신도시 공급이다, 대기환경개선이다 하면서 정부는 정부대로 수도권 과밀로 인한 사회비용을 앞장서서 떠맡고 있다. 언제나 지방에는 양떼가 뛰어 놀 풀밭을 갖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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