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오종 한라대 경영학과 교수
TV에 차 광고가 나왔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오늘을 말해줍니다. 그랜저 뉴 럭셔리”

인터넷에서 광고를 찾아 자세히 살펴보니 대답을 듣는 친구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짐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광고를 본 사람들 상당수 역시 어이없어하거나 불쾌하게 느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막대한 경비를 들여 광고를 의뢰한 측이나 광고를 제작한 측은 큰 실수를 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광고가 처음 선을 보인지 상당한 시일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전파를 타고 있음이 이를 웅변한다. 그들은 상당수의 사람이 광고를 역겨워하며 분노할지라도 일부 다른 사람들은 광고를 보고 자신들의 오늘을 말하지 않는 가운데 말하고자 그랜저를 살 것이라고 미리 치밀하게 계산했으며 그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차 광고가 끝나자마자 뉴스는 화제의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관객 수가 놀랍게도 200만 명을 훌쩍 뛰어넘었음을 전했다.

갑자기 오래전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명저 ‘소유냐 존재냐’가 뇌리에 떠올랐다. 프롬은 이 책에서 인간 생존의 두 가지 양식, 즉 재산·지식·지위·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 양식’과 자신의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여 삶의 기쁨과 보람을 찾아가는 ‘존재 양식’을 구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우리의 가치, 우리의 주체성, 혹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점점 익숙해지면서 ‘소유 양식’에 물들어가고 있다. ‘소유 양식’에서는 주체와 객체를 ‘물건’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는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죽은 관계이다. 어법에서도 ‘소유 양식’이 약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언어 사용에 명사가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동사가 차츰 더 적게 사용되고 있다. 어느 환자가 정신과 의사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저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어요.” 몇 십 년 전이라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는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어요.” 경험하는 ‘나’라는 존재가 소유의 ‘불면증’으로 대체된다. ‘나’는 나의 모습을 내가 가진 그 무엇으로 즉 ‘불면증’으로 변모시키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나’는 정말 ‘불면증’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불면증’이 ‘나’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에 반하여 ‘존재 양식’에서 존재는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속박당하지 않으며 변화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성장한다. 그것은 하나의 결정된 형식이나 태도가 아니라 유동하는 과정이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주고 나누어 가지며 관심을 함께 가지는 살아있는 관계가 된다. 그것은 삶의 긍정이다. 프롬이 즐겨 쓰는 비유를 빌린다면 함께 삶의 무도회에 참가하는 것이다.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는 할머니로부터 “소가 죽어야 내가 편케 산다.”, “누구는 싱싱한 영감 만나서 농약도 치는데.”라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소에게 줄 꼴을 제대로 마련하기 위해 농약을 치지 않는다. 소의 등짐을 나눠지기도 한다. 옆 논에서 트랙터와 콤바인 소리가 들려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의 목에서 딸랑거리는 워낭소리를 들으며 힘겹게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간다. 어떻게 보면 할아버지를 위해 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를 위해 할아버지가 살아가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소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소유 양식’을 거부하고 ‘존재 양식’을 고집한다. 그래서인지 ‘워낭소리’의 영어 제목은 희한하게도 ‘Old Partner’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친구의 안부 인사에 나의 오늘을 말해주기 위해 그랜저로 답할 것인가. 아니면 삶의 무도회에서 소와 함께 춤을 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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