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정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인생을 안전하게 살기 위해 기본적인 수준의 두려움이 필요하다. 두려움은 학습을 통해 배우는 감정이다. 그러나 유아기부터 두려움이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감정이 된다. 자전거타기, 수영하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등,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이란 점차 확대되는 물리적·정신적 가능성을 실제 능력으로 바꾸어 나가는 시간이 아닐까. 본격적인 제도교육이 시작되면 두려움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교사와 같이 권위를 가진 타인을 두려워하면서 교육내용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한계를 극복하면서 스스로를 교육하는 방식이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피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내게도 남에게도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두려움이란 감정은 몇 가지 영역에서 주목된다. “두려움은 없다(No Fear)”라는 의류 상표가 표방하듯이, 스포츠 영역에서 사람들이 싸워 이겨야 할 진짜 대상은 자신의 두려움이다. 후기산업시대의 소비심리나 세계금융위기의 전개양상이 말해주듯이, 개인의 경제적 선택은 시장원리가 아니라 두려움에 따르는 것 같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 것을 잃을 두려움에 비굴해지기도 하고 반대로 공격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두려움은 사실에 대한 판단이나 객관적인 상황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순수 언어적 사고를 통해 증폭되고 나아가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시킨다. 그래서 두려움은 믿음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두려움을 낳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스포츠에서 자기와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중하는 것, 즉 마음을 현재에, 하고 있는 일에, 두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법도 이제는 소신있는 소비태도를 필요로 한다. 시장 좌판에서 야채를 사도, 자녀의 학원수업을 줄여도, 명품이 하나도 없어도, 텔레비전에 나온 제품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괜찮은지 아닌지는 자신의 생활철학과 가치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없애는 방식은 공존을 전제로 타협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두려움과 관련된 생각을 멈추는 것만이 내안으로 또 남에게로 퍼지는 두려움의 전파를 막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소위 ‘서거 국면’에서는 누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을까. 기쁨으로 충만하거나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두려움을 잘 느낄 수 없다. 집중상태와 유사하게 현재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마디에서 우리는 여러 건의 저항적 자살과 정치적 타살을 보아왔다. 이런 죽음들에 대해 감정적 동일시를 하고 슬픔을 느끼는 마음에서는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다. 반대로 조금의 동일시도 허용하지 않는 마음은 모든 죽음이 산 사람에게 전달하는 두려운 감정의 영향을 받으며, 어떤 식으로든 이를 상대편에게 전파하고자 무언가를 빌려 목소리를 높인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하여 내게 분명한 한 가지는, 그분이 늙어가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 주는 짙은 슬픔이다. 그러나 애도는 감시당하고 있고 애도의 사를 감추건 드러내건 사람들은 자기 검열을 강화해나가는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광장이나 시민, 자유와 질서같은 말이 과거와 다른 낯선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사회의 지금 이 시간이 걱정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남·녀, 노·소, 빈·부, 좌·우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집단 불안증과 박탈감, 피해의식을 직시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차분하게 성찰하고, 명료하게 정리하고, ‘두려움 없이’ 변화해야 할 것이다. 요즘 이메일에 자주 쓰게 되는 말이다. “날씨는 무덥고 마음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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