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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국회의원을 돌아본다

남궁창성 2016년 04월 18일 월요일
   
▲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6·25 난리통에 피난민 텐트촌에서 태어난 사내 아이가 있었다. 철원에서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됐다. 나중에 부모님을 모시려면 밥벌이는 해야 한다는 누나들 덕분에 서울로 가 한양공고 전기과에 입학했다. 졸업을 1년여 앞두고 진로를 걱정하던 그에게 학비가 무료에, 재워주며 먹여주고 대학 공부도 시켜주는 곳이 있다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공부하기도 버거운 형편에 육사에 들어가기 위해 국·영·수를 따로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진학 대신 취업을 권했다.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고 다니는 하나뿐인 남동생을 보다못한 누나들이 나서 영어와 수학 학원비를 대주는 대신 국어는 자습한다는 조건으로 육사 진학을 허락했다.

1971년 육사(제31기) 입학후 사관생도 생활은 고되고 힘들었다. 늘 명예, 양심, 긍지, 인격, 신념 등을 마음에 새겼다. 장교로서 갖춰야 할 문과 무를 익히는 동시에 천주교 부장생도로 활동하며 책임감과 신앙심도 키워갔다. 그는 누군가 장군, 재벌회장, 대통령이 됐다 해도 그 사람이 이뤄낸 지위를 보고, 그가 사람의 도리를 다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아가 어느새 ‘의(義)를 위한 패배자’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됐다. 임관후 그는 3사단 수색중대장, 수도경비사령부 유격대장, 수도기계화사단 대대장으로 야전을 누볐다. 사단장 전속 부관과 사단사령부 작전참모 등으로 박세직, 이현부 장군을 모시며 참 군인 상도 배웠다. 덕장과 지장의 면모를 갖춰가던 그는 1994년 동해안 일원을 책임지는 22사단 53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자신과 가족에게 유독 엄했던 그는 간성읍으로 통학하는 어린 자녀들에게 버스를 타고, 군용차는 타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 부대원들에게도 이를 어기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자신도 존경했던 선배 군인들을 하나하나 닮아갔다.

그는 2사단장,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 5군단장, 육군 교육사령관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사단장 재임중에도 예하 부대들이 행군에 나서면 예외없이 20㎞씩 선두에서 걸었다. 군단장 시절에도 40㎞씩 행군하며 어린 장병들과 컵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3성 장군이던 그는 2010년 1월 전역을 3개월여 앞두고도 동계 혹한기 야간 행군에 동참하며 늘 그랬듯이 장병들과 동고동락했다. 2010년 4월 27일. 전역하며 세상에 내놓은 자서전 ‘오성산 군인’ 출판기념회에는 선후배 군인은 물론 주둔지 마을 주민들도 찾아와 군인 한기호에게 존경과 신뢰를 보냈다. 그는 같은해 7월 치뤄진 제18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고, 19대 국회의원에 재선되면서 6년여 동안 정치인으로서도 그 본분에 충성을 다했다.

총선 열기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지난 9일 오전 10시 횡성읍 3.1운동 사거리. 새누리당 유세차에 오른 권성동, 김무성, 염동열 의원이 연설을 이어갔다. 한기호 의원은 단상 아래에서 동료 당직자들과 “새누리당!!, 염동열!!”을 목청껏 연호했다. 20대 총선에서 지난 6년간 땀으로 일궈온 지역구를 동료에게 내준 그는 단장의 아픔을 안으로 누르고, 삭히며 선거전 내내 백의로 종군했다. 그리고 새누리당이 전국적으로 무참히 허물어진 선거판에서 강원도당 선대위원장으로서 6개 의석을 지켜내며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권력과 명예에 취한 나머지 배신과 음모 그리고 공작이 난무했던 20대 총선을 되돌아 보며, 자신을 버리고 당과 동료를 묵묵히 지켜낸 인간 한기호(韓起鎬)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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