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건강은 짜여진 각본이 아니다
의대 증원 방침 반대에
의사들 밥그릇 지키기라 몰아붙이는 정부
의료계와 대화 하나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정부
한산한 병원 로비
응급환자 돌보느라 쪽잠 자는 의사들
2000명 증원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가능하지도 않은 질주하는 정부 모습 딱해

일상이란 단어는 좀 억울할 듯 싶다. 특별할 게 없는 나날이라는 의미로 평가절하 되곤 하기 때문이다. 매일이 기적 같을 수 없다면 반복되는 일상도 죄가 될 수는 없다. 어제와 같은 오늘도 자세히 보면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강릉 사천면에 둥지를 튼 심상복 컬쳐랩 심상 대표가 ‘일상 그 너머’를 캠으로써 미처 발견하기 어려운 일상 속 의미를 찾는다. 영동지역에서 만들어 가는 삶의 모양을 전하면서 사회에 대한 통찰도 덧붙인다.
 

▲ 강릉 아산병원의 외래환자 진료가 절반 가까이 줄어 대기실도 한산하기 그지없다.
▲ 강릉 아산병원의 외래환자 진료가 절반 가까이 줄어 대기실도 한산하기 그지없다.

살면서 이사는 큰일에 속한다. 3년 전 오랜 서울 생활을 접고 강릉으로 오는 일은 더욱 그랬다. 아내는 저만치 바다가 보이고, 병원도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발품을 팔다 보니 운 좋게 그런 입지를 만났다. 하평 들판을 건너 거대한 흰 코끼리 같은 강릉아산병원이 보인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행복은 십중팔구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고 했다. 거지도 건강하기만 하면 병든 왕자보다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도 있다.

건강이 제일이라는 금언은 차고 넘치지만 건강 지침대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탓에 많은 사람이 병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장기 입원을 하거나 수시로 병원을 드나든다. 아직 그렇지 않은 이들도 미래의 일상을 이미 병상에 예약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며칠 전 강릉아산병원을 둘러봤다. 오전 9시쯤이었는데 60대 자식이 미는 휠체어에 앉은 어르신이 병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고령화하는 지방 도시를 인증하는 한 컷이었다. 나이 든 아들은 “아버지가 재작년부터 심장이 안 좋아 병원을 찾곤 한다”며 “그래도 고 정주영 회장님 덕분에 집에서 15분이면 이렇게 좋은 종합병원에 올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주말을 쉬고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인데 병원은 전반적으로 한산했다.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파업 사태가 한 달을 넘기면서 갖가지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고 들었는데 현장은 오히려 조용했다. 이 병원의 전공의 70명 중 90%가 이탈하면서 진료는 약 40%, 수술은 절반 이상 줄었다는 거였다. 입원 병동 3개 중 하나도 이미 폐쇄했다.

유창식 병원장은 “우리 병원은 영동지방의 유일한 상급종합병원이다. 북단의 고성에서 남쪽으론 삼척, 울진까지 커버하는데 현재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고 호소했다. 신경외과 양구현 과장은 요즘 운동화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뛰어다닌다. 뇌출혈이나 뇌졸중 환자는 촌각을 다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발생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네 평 연구실의 소파에서 잠을 때우는 경우도 많다. 양 과장은 “강원도에 사는 것이 죄가 돼선 안 된다”고 말한다. 소외 지역이라고 의료혜택을 못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양내과 전문의인 오호석 진료부원장도 요즘 환자들을 보느라 정신없다.

그럼에도 순번이 밀리는 환자들은 공공의료기관인 강릉의료원으로 간다. 김종욱 의료원장은 “최근 외래 환자가 30% 정도 늘었다”고 했다. 그 바람에 응급의학과 양대현 과장이나 소아과 김영광 과장은 더욱 바빠졌다.

의대 교수들이 의대 증원 방침을 반대하자 정부는 ‘밥그릇 지키기’라며 몰아붙였다. 의사들은 지금 상태로는 증원을 해도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흉부외과, 응급의학과 등 필수의료 쪽으로 가는 의사는 별로 없을 거라고 주장한다.

소아과 전문의가 피부과나 성형외과로 가면 연봉을 2∼3배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도 이런 문제점을 잘 안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이 강공으로 나가자 소신발언 한마디 하지 못했다. 전공의가 파업한다고 대형병원들이 안 돌아가는 게 말이 되냐고 비판하지만 병원마다 배치되는 전공의 숫자는 보건복지부가 정해주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을 거덜 내고, 의사들이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으로만 몰리는 현실도 정책 탓이라고 의료계는 입을 모은다.

그럼에도 정부는 의대 2000명 증원 정책을 의료계와 대화 하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현 의대 정원의 65%를 한꺼번에 늘리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고 여겼을까. 교수도, 실습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정부는 또 의사들의 제약사 갑질행위를 신고하면 최대 30억 원의 보상금을 주겠다고 밝혔다.

현재 전국 전공의 중 90%를 넘는 1만여 명이 파업해 병원이 안 돌아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법대로 면허정지 처분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일부 의사들이 해외 취업을 언급하자, 행정 처분을 받은 의사는 불가능하다고 응수했다.

의대 교수들마저 사직하고 정권퇴진 운동을 벌이겠다고 하자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나서 이제 겨우 대화의 장이 열리고 있다. 설마 이것도 각본일까. 각본이 아니라면 강공 일변도로 나가 상황을 이처럼 악화시킨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4·10 총선이 코 앞인데 정말 무슨 배짱인지 모를 일이다. 가장 부유한 직군을 공격하면 총선에서 표가 나올 것으로 판단했을까. 의대 증원은 집단간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혀 있는 문제다. 정부와 의료계, 의료계와 환자, 의료계 안에서도 의사·간호사·한의사의 생각이 다 다르다. 이런 난제를 의대생 2000명만 늘리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접근했다. 가능하지도 않은 완승을 향해 질주하는 정부 모습이 딱하기만 하다.

컬쳐랩 심상 대표 simba363@naver.com

 

▲ 심상복 컬쳐랩 대표
▲ 심상복 컬쳐랩 대표

심상복=△서울대 경영학과·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중앙일보 뉴욕특파원·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한양대 특임교수·이화여대 초빙교수 △현재 컬쳐랩 심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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